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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李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823
한자 李裁
영어공식명칭 Lee Jae
이칭/별칭 경배(景培),월파(月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92년연표보기 - 이재[李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32년 - 이재[李裁]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32년 - 이재[李裁] 집현전 학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이재[李裁] 예조 판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55년 - 이재[李裁] 대구도호부 하동면 은거
몰년 시기/일시 1464년연표보기 - 이재[李裁] 사망
출생지 한양 - 서울특별시 중구
거주|이주지 하빈현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묘소|단소 이재[李裁] 묘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사당|배향지 추색정 -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경주
대표 관직|경력 예조 판서

[정의]

조선 전기 달성 지역에 은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배(景培), 호는 월파(月坡). 고조할아버지는 월성 부원군(月城府院君) 문효공(文孝公) 국당(菊堂) 이천(李篟)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계림 부원군(鷄林府院君) 제정(齊亭) 문정공(文靖公) 이달충(李達衷)이다. 아버지는 공의공(恭懿公) 이승적(李升啇)으로 1382년(우왕 8) 훗날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과 함께 성균시에 급제하였는데, 이승적이 장원이라 하여 이방원이 후하게 대우하였다. 1401년(태종 1) 좌명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413년(태종 13) 2월 6일 『태종실록(太宗實錄)』「이승적 졸기」에는 아들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이재가 이승적의 양자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활동 사항]

이재(李裁)[1392~1464]는 1432년(세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는데,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문종(文宗) 때 호조 참판을 거쳐 단종(端宗) 때 예조 판서에 발탁되어 정무에 힘썼다. 수양 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을 위한 야심 때문에 김종서(金宗瑞), 황보인(黃甫仁) 등이 해를 입자 벼슬을 그만두려고 하였지만 단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병을 빙자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대구도호부 하빈현[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마을 사람들조차 이재가 판서를 지낸지도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단종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매일같이 집 뒤 산골짜기에 들어가 서울을 향해 목 놓아 울다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1464년(세조 10) 73세로 임종할 때 “장례를 간소히 치르고 무덤에는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묘소]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후손들이 묘소 아래에 추색정(秋色亭)을 짓고 이재를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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