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817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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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郭壽龜 |
영어공식명칭 | Kwak Sugu |
이칭/별칭 | 원석(元錫),예포(禮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광우 |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석(元錫), 호는 예포(禮圃). 증조할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곽종경(郭宗慶), 할아버지는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곽위국(郭衛國)이다. 아버지는 용양위 부사용(龍驤衛副司勇)을 지낸 곽희천(郭希天),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정인달(鄭仁達)의 딸 동래 정씨(東萊鄭氏)이며, 부인은 성산 여씨(星山呂氏)이다.
[활동 사항]
곽수구(郭壽龜)[1636~1709]는 어려서 집안 어른인 곽융(郭瀜)에게 학문을 배웠다. 1687년(숙종 13) 52세의 늦은 나이로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으며, 1691년(숙종 17)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곽수구는 과거 급제 이전부터 두터운 명망이 있어, 1691년 가을 정6품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고, 훗날 병조 좌랑(兵曹佐郞)에 올랐다. 관직에 있을 때, 승려가 문졸(門卒)을 꾀어 궁궐에 들어오는 사건이 있었는데, 곽수구가 그 억울함을 알고 죄인을 가볍게 처벌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충청도 황간현(黃澗縣)[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1696년(숙종 22)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상례(喪禮)를 치름에 예를 다하였다. 이후에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학문과 저술]
곽수구는 많은 저작(著作)을 남겼으며, 유고(遺稿)가 전한다. 집안에서 예법을 행할 때에는 하나 같이 정구(鄭逑)의 가례(家禮)를 따랐으며, 자제들을 훈시하기 위하여 사훈칠계(四訓七戒)와 가범(家範)을 지었다. 또한 이형상(李衡祥)·이재(李栽)·권두경(權斗經)·신몽삼(辛夢參)·정중원(鄭重元) 등의 어진 선비들과 교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