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09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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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유기장마을,고리백정마을,고리백장마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대구 지역에 있던 조선 후기 유기장 마을.
[개설]
조선 시대의 소외 계층인 백정(白丁)은 고려 시대의 양수척(楊水尺)이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으로 분화되었다가 1423년(세종 5)에 개칭된 것이다. 백정으로 개칭된 이후에도 백정들은 성(姓)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저기 떠돌면서 구걸, 사냥, 도살 및 고리·가죽 제품 제조와 판매, 공연[창우(倡優)] 등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다가,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면 절도와 강도 등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서로 같은 마을에 살면서 혼인하기도 하였으며 돌이, 강아지, 차돌이, 마당 등 천한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내용]
조선 시대 호적을 보면, 16세기 전반에는 신백정, 17세기 전반에는 백정, 17세기 후반부터는 생업에 따라 유기장(柳器匠)·피장(皮匠)으로 실려 있다. 껍질 벗긴 버들 가지를 엮어서 만든 상자인 고리를 만드는 유기장은 흔히 고리쟁이나 고리백정 또는 고리백장, 가죽 제품인 피물(皮物)을 만드는 피장은 갖바치나 피쟁이로 불렸다.
『대구부 호적대장』[『대구부호구장적』]을 보면, 고리쟁이들은 농촌 외딴 곳인 대구부 하남면 마곡리[매곡리]와 화현내면 명곡리에서 일반 백성들과 섞여 살다가 고리쟁이들로 구성된 마을로 분동되었다가 소멸되어 갔다.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의 고리쟁이 4세대 23명은 1690년 연화리(烟火里)로 분동되었다가 소멸하였고, 화원읍 명곡리의 고리쟁이 7호 30명은 1774년 차리(次里)[또는 하리]로 분동되었다가 1837년 1호를 끝으로 사라졌다.
고리쟁이들의 분동은 백정들에 대한 배타적 차별 때문이었다. 양반은 물론 상민과 노비들의 차별로 인하여 고리쟁이마을인 연화리와 차리는 자연 마을 상태로 기존의 동에서 나눠지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