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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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皮匠- |
이칭/별칭 | 백정마을,갖바치마을,피장마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재두 |
[정의]
조선 후기 대구읍성 남문 밖 저지대에 있었던 갖바치 백정 마을.
[개설]
조선시대에는 가죽제품인 피물(皮物)을 만드는 장인을 피장(皮匠), 갖바치, 피쟁이로 불렀는데, 신분적으로 양인이지만 대대로 천역인 소 도축과 가죽제품 생산에 종사하면서 천인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다. 『대구부 호적대장』을 보면, 대구부 서상면 노하리는 1738년부터 1876년까지 140여 년 동안 피쟁이마을이었다. 노하리는 대구읍성의 남문 밖, 현재 반월당 앞 달구벌대로에 있었으며, ‘도하(道下)’ 또는 ‘노하(路下)’라는 마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길 아래의 저지대에 있었다.
[내용]
피쟁이마을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던 백정들의 습성으로 인하여 유동 인구가 대단히 많았다. 노하리 피쟁이마을은 1738년에는 가구 수 8호에 33명이었다가, 18세기 말까지는 가구 수 12~17호에 39명~85명 정도를 유지하였으며, 19세기에는 가구 수 19~45호에 인구 수 60명~107명 정도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노하리 피쟁이들은 성과 본관을 사용하였으며, 부녀자들은 성에다가 조시(助是, 조이)를 붙였다. 김태석(金太石) 가계는 138년간 7세대, 유유발(兪有發) 가계는 138년간 5세대, 김돌이(金乭伊) 가계는 129년간 5세대, 이종발(李從發) 가계는 123년간 5세대에 걸쳐 노하리에 세거(世居)하였다.
대체로 성비는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었는데, 공물 등 각종 부세(負稅) 징발의 대상이 될 남자아이와 남성을 철저히 조사하여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노하리 주민들 중에는 돌이, 돌돌이, 차돌이, 돌쇠, 강아지, 도야지, 마당개, 작은개, 동내개, 똥개, 개조지, 마구, 통시, 똥이, 개똥 등과 같이 천한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1738년 당시 노하리는 피쟁이와 고리쟁이들로 구성되었으나, 점차 고리쟁이가 피쟁이로 전환하는 추세를 보이다가 1783년부터는 피쟁이들로만 이루어진 마을로 바뀌었다. 이 같은 현상은 대구부가 경상감영의 소재지로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른 도시 소비 인구 증대, 대동법 실시로 인한 수납용 공물 조달 등에 따른 쇠고기 판매, 가죽제품에 대한 구매력 증대 현상 등과 맥을 같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