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1101 |
---|---|
한자 | 七八慶北大民主救國宣言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윤정원 |
[정의]
1978년 11월 대구의 경북대학교에서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대규모 반유신 시위.
[역사적 배경]
1974년 경북대학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일명 민청학련 사건]으로 13명의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1975년 4월 9일 경북대학교 동문 여정남이 박정희 정권 최대의 공안 사건인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이 집행된 이후 경북대학교에서는 단 한 건의 시위도 없이 잠잠히 지나갔다. 그러나 부패한 독재권력과 사복경찰이 학내에 상주하며 학원을 감시하는 데 불만을 가진 학생들의 유신 독재체제에 대한 반감은 점점 쌓여 갔다. 박정희와 대구사범학교 동기인 김영희 총장의 과도한 학원 통제에 대한 불만도 쌓여 갔다.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불만과 반감은 유신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유신 시위로 발전하였다.
[경과]
78 경북대 민주구국선언 사건(78慶北大民主救國宣言事件)은 두 차례 전개되었다. 1978년 11월 5일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내용의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반유신 시위에 나선 것이 1차 78 경북대 민주구국선언 사건이다. 복현독서반 회원인 장수원, 최용식, 김동호, 유시대와 남영주 등이 주도한 반유신 시위에는 경북대학교 학생 1,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시위가 격화되자 시위를 주동한 학생들은 학내에 상주하는 경찰과 교직원에게 끌려가 구속 수감되었다. 곧바로 열린 학교 징계 회의에서는 주동 학생들의 제적과 관련 학생들의 무기정학 처분이 내려졌다.
유신정권과 학교 당국의 처사에 학생들의 분노는 폭발하였고 1978년 11월 8일의 2차 78 경북대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이어졌다. 11월 8일 전개된 반유신 시위는 유신 치하 최대 규모의 가두시위였다. 경북대학교 학생 8,000여 명[당시 경북대학교 학생 1만 명 정도]이 참가한 대규모 가두시위는 격렬하였다. 시위를 저지하려는 경찰 병력을 뚫고 학생들은 체육관 뒤편 길을 이용하여 경상북도청 앞으로 가두시위를 이어 갔다. 도청을 지나 대구 시내로 진출한 경북대학교 학생들은 시민회관 앞에 재집결하였다. 대구 시내를 관통하며 향촌동, 대구백화점, 중앙파출소, 반월당, 대한극장 네거리, 남문시장으로 진출한 시위대에는 대구 시민들까지 합세하였다.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펼쳤다. 시위대는 대구에 반유신의 목소리가 살아 있음을, 유신체제 붕괴가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하였다.
11월 8일의 반유신 시위를 기념하여 경북대학교 학생 함종호가 작사·작곡한 「이만가」 혹은 「팔천건아가」는 이후 경북대학교뿐 아니라 대구 지역 운동 현장에서 회자되었다.
[결과]
두 차례의 78 경북대 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27명이 연행되었고 7명 구속, 13명 제적 등 총 67명이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의의와 평가]
78 경북대 민주구국선언 사건은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대구 시민과 함께 전개함으로써 유신의 심장부인 대구에서 박정희 유신체제를 강력히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