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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병영화반대 교련철폐투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47
한자 學院兵營化反對 敎鍊撤廢鬪爭
영어공식명칭 Against Academic Barracks, Abolition Struggle of School Dril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윤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70년 12월 7일연표보기 - 학원병영화반대 교련철폐투쟁 개최
설립 시기/일시 1971년 4월 19일 - 교련 반대 성토대회 개최
성격 학생운동

[정의]

1970년 12월부터 대구 지역의 대학에서 전개된 교련 교육 강화 반대 운동.

[개설]

학원병영화반대 교련철폐투쟁(學院兵營化反對敎鍊撤廢鬪爭)은 반공을 빌미로 대학을 병영화하여 학원 자율화를 억압하려는 박정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하여 전개되었다.

[역사적 배경]

박정희 정권은 1968년 1월 21일 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1·21 사태|김신조 사건]과 1968년 1월 23일 미군함 푸에블로호가 북한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 등을 계기로 더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968년 「주민등록법」 시행과 향토예비군 창설, 국민교육헌장 제정, 대학에서 국민윤리 필수과목으로 지정 등의 조치를 단행하였다. 학원 내 군사교육인 교련 과목 이수를 남자고등학교부터 시작하여 1970년 2학기부터는 여자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확대 실시하는 등 학내 군사훈련도 강화하는 방침을 마련하였다.

1970년 12월 박정희 정권은 교련을 강화하는 시행 요강을 발표하였다. 대학 4년간 총 수업시간의 약 20%에 해당하는 711시간의 교련 수업을 받고, 군사교육을 위하여 대학교에 현역 군인을 배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교련 과목 이수는 학원 통제를 강화하고 학원 병영화를 위한 조치이며, 학원 병영화는 곧 장기 집권을 위한 조치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대구 지역 대학생들도 1970년 12월 7일 경북대학교를 선두로 교련 폐지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1971년은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는 해였다. 선거를 앞두고 교련 강화를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는 4월 연세대학교를 시작으로 전국의 대학교로 확산되었다. 경북대학교 총학생회는 1971년 4월 8일 학생대표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간부 회의를 열고 교련 실시를 반대하기로 결의하였다. 결의에 따라 교련 반대 성토 대회를 4월 12일부터 3일 동안 개최하였다.

대통령 선거 유세 기간 중에도 교련 철폐 투쟁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971년 4월 14일에는 서울대학교에서 경북대학교, 서울대학교, 전남대학교 등 전국 11개 대학교 학생 대표 200여 명이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연맹’을 결성하고 교련 철폐 운동과 공명 선거 캠페인 등이 담긴 10개 항목을 행동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경과]

학원병영화반대 교련철폐투쟁경북대학교를 선두로 대구 지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경북대학교 학생들은 1970년 12월 7일부터 3일 동안 교련 강화와 학원의 병영 기지화를 반대하는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1971년 2월 10일 민주공화당 경북지부는 신민당 중앙당이 서울 모대학 총학생회장을 대구로 보내 자금을 제공하고 교련 강화를 구실로 반정부 시위를 꾀하고 있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경북대학교계명대학교 총학생회는 2월 18일 민주공화당의 성명을 비판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경북대학교계명대학교 총학생회장은 성명서에서 민주공화당 경북지부가 발표한 성명은 허위 사실을 조장하고, 법과 질서를 망각한 비민주적 행위라고 규탄하였다. 1971년 4월 19일에는 4·19혁명 기념식과 함께 교련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1971년 4월 20일에는 영남대학교 학생 300여 명이 교내에서 교련 반대 모임을 가진 후 경산 읍내에서 성토대회를 열어 교련 반대, 학원 사찰 중지, 휴강 조치 철회, 언론 탄압 중지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시위를 벌였다

[결과]

학원병영화반대 교련철폐투쟁은 4월 27일 대통령 선거 실시를 앞두고 공명 선거 운동으로 활동 방향을 전환하여 교련 철폐 투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2학기에 접어들면서 다시 불붙기 시작한 교련 반대 운동이 점점 거세지자 박정희 정권은 1,889명의 학생을 연행하고 그중 119명을 구속하였다. 대학에서는 문교부[현 교육인적자원부]의 압력을 받아 23개 대학에서 117명을 제적시킴과 동시에 즉각 입영 조치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탄압 조치로 7개월간 지속되었던 교련 반대 운동은 끝이 났다.

[의의와 평가]

학원병영화반대 교련철폐투쟁은 교련 강화를 집권을 연장시키기 위한 방책 중 하나로 인식하고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는 투쟁으로 이행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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