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696 |
---|---|
한자 | 徐健洙 |
영어공식명칭 | Seo Geonsu |
이칭/별칭 | 성암(性菴)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대구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장세윤 |
출생 시기/일시 | 1874년 1월 17일![]()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 서건수 파리장서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53년 6월 15일![]()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출생지 | 우록리 -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 |
거주|이주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활동지 | 대구 - 대구광역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건수(徐健洙)[1874~1953]는 1874년 1월 17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파리장서 운동이 전개될 때 유림 대표로 참여하였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호는 성암(性菴)이다.
서건수는 기호학파 학맥인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와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1825~1905]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김창숙(金昌淑)·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의 유학자들은 조선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하였다. 이에 여러 유학자들의 서명을 받았는데, 서건수도 대구[달성] 유림 대표로 서명하였다. 장서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기로 하였으며, 이와 별도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러나 1919년 4월 12일 성주의 송회근(宋晦根)이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는 바람에 파리장서 운동의 전말이 발각되어, 서건수도 일제 당국으로부터 고초를 겪었다. 서건수는 1953년 6월 1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서건수의 공적을 기려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